추이졘민(崔健敏) 장태하 제공
张泰河:薪火相传中韩情
장태하, 대대로전해지는 한중 감정
추이졘민(崔健敏) 장태하 제공
화교화인의 청서인 <화교연구보고서(2013)>에 의하면 2013년 3월까지 한국에서의 화교 및 화인의 총인원수가 51.45만에 달하고 그들은 금융, 부동산,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둘 중의 많은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한·중 우호 교류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타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그들의 적자지심에 감동을 많이 받았다. 그들이 있어서 한·중 우호발전에 크게 기대해도될 것이다.
사진은 모유지(필명 만징)의 서예작품이다.图为牟惟芝(笔名曼菁)的书法作品。
지난 1990년대 초, 저는 일 때문에 많은 한국에 있는 화교와 한국적중국인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 몇분은 저와 친하게 지내 왔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교령(교민 가운데 명망이 높은 사람)인 장태하 씨는 저의친한 친구 중에 한 분이다.
장태하 씨를 처음에 만났을 때 그의 이름 중의‘태’자와‘하’자는각‘태산’,‘황하’의 의미를 담고있다는 얘기를 하다 보니 그의 적자지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동안그는 한국 화교단체를 조직하여 몇번이나 산둥성 각 지역에 가서 참관,고찰하면서 문화교류를 진행했다.장태하 씨와 만나면서 그의 넓은 학식, 유창한 고향 말씨, 그리고 사람을대하는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는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태하 씨와 그의 부인 모유지 여사는 모두 한국에서 태어난 제2대화교이다. 장태하 씨의 부모는 옛날에 생계를 꾸리러 산둥성 웨이하이(威海)시에서 한국으로 건너갔고 모유지씨의 부모는 옌타이(烟台)에 출생하고 부친은 젊었을 때 한국에 가서 나이가 들어 울산에 정착하여 현지의 유명한 서예가가 되었다. 모유지 씨는 어려서부터 가점의 예술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서예의 조예가 매우 깊었다.
1970년대 장태하 씨와 모유지 여사는 원주 화교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만났는데 비슷한 가정 배경으로 서로 알게 되며 같은 꿈에 대한 집착을 통해 서로 사랑하게되어 결혼했다. 그 당시 교사의 봉급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같이 식당을운영하면서 근면과 절약으로 적지않은 저축을 모아 뒀다. 이로써 수십년 동안 화교학교에서 교사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은 중국어 교육와 보급에 대해 지극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984년에 자기가 경영했던 식당을 중국어학원으로 개조했다. 학원 창립 처음 3년 동안, 과외를 위주로 했고 학생은 별로 많지 않았다. 1987년, 한중 양국 수교를 앞두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면서 중국어를 절실히 배우고 싶은 학생들이 급히 늘어났다. 이와 동시 각지역의 고등학교, 대학교에도 중국어 과정을 개설하여 장태하 씨가 연세대학교(원주캠퍼스)의 초청을 받고경영학과에서 중국어 교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모유지씨도 현지 상지여자고등학교와 원주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현지 기업의 책임자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2000년과 2012년에 제가 두번이나 원주에 가서 그들의 중국어학원을 참관한 적 있었다. 학원대문 앞에멋진 대련과 붉은 등롱, 교실과 복도에 중국식 장식품과 학생들의 사진들을 결려있고 객실에 있는 모씨부녀의 서예작품이 농후한 중국전통문화의 분위기를 뿜으며 고색이 창연한 진열물과 잘 어울린다. 한국학생들은 발음이 똑똑한 학원교사들의 실력을 인정했고 성적이 빠르게도 올라가게 되었다. 학부모들도 이학원의 교학품질과 학습환경에 대해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젊은이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사람들도 공부하러 이 학원을 많이 찾아왔다.
지난 12년 동안에 장태하씨는 원주화교초등학교 교장, 원주화교협회 회장, 강원도화교협회 회장, 한화중문학원연합회 회장, 한화학술연구회 회장, 한국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경영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그는 재한 화인화교의 교육, 권익보호, 역사연구와 우호교류 활동에 모든 심혈을 기울렸을 뿐만 아니라 중화문화의 보급, 중국어의 교육연구도 아주 중요시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개최된‘한화학술연구회’제1회학술발표회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했고 또한 몇 번이나 중국국무원 교민업무사무실에서 샤먼, 베이징, 옌볜등 지에서 개최한 국제중문교육심포지엄을 참석했으며 지도의미를 가진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태하씨는 한국의경제, 문화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에 있는 화인화교들과 같이 한국정부의 법률법규를 잘 지키며 한국인이 열린 문화교류활동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자주 한중양국의 젊은 사람에게 서로 존중하고 배우고 우정을 튼튼하게 다져 한중 양국 민간교류에 자기의 역량을 바치라고 격려하였다.
중국에서‘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옛말이 있다. 모유지씨는 현재 한국서울서예전 특별초청작가이며 한국중부서예전 특별초청작가이다. 또한 강원도여자서예가협회 회원, 한라대학교, 원주문화교육원 강사이기도 한다. 2002년에 개최된 한중일국제서예교류전에서 그녀는 우아한 기질과 능숙한 서예기술로 참관자의 호평을 많이 받았다.
장태하 부부는 아들 둘, 딸 하나를두었다. 큰 아들 장경한은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한 후 의사 자격증을 취득해 지금 서울에서 성형외관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큰 며느리는원주 연세대학교에서 교사직을 담당했다가 지금 두 딸의 엄마가 된다.작은 아들 장경호는 한국세명대학교의학과에서 졸업한 후 서울차병원에서 산부인과 및 소아과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해 지금 원주에서 모아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작은 며느리도 한국 사람이며 두 사람은 딸 둘,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장태하 씨의딸 장경매는 타이완대학교에서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취득했다. 지금 남편과 함께 연세대학교(원주 캠퍼스)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동시에 장태하 부부에의해 설립된 베이징언어학원을 관리하고 있다.
반 세기나 넘은 긴 창업 세월에 장태하씨는 언제나 담당함이나 억울함을 모르고 계속 노력해 왔다. 양쪽귀밑머가가 이미 희끗희끗한 지금이라도 식구가 모두 15명인 집안에서장태하씨는 여전히 제일 먼저 일어난 사람이다. 십여 년 동안 장태하씨와 부인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한국 사돈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미 늙었지만, 장태하 부부는 적극적으로 현지의 문화활등에 참가하여 중국문화를 전파하고 한·중양국의 우정을 다지는 데 힘쓰고 있다. 그들의 부지러하고 봉사하는 모습은 이미 한강 위에 찬란한 스타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본문 작가는 중부유럽문화예술연합회 산둥분회 부회장, 산둥동악서화원 부원장)
张泰河:薪火相传中韩情
上个世纪九十年代初期,由于工作关系,我认识了许多华侨、华人,有几位还成为我的好友,其中一位是韩国著名的侨领张泰河先生。
第一次见张泰河时,我们就探讨过他名字中镶嵌的“泰山”和“黄河”的寓意,充分印证了他的赤子之心。他先后多次带领韩国华侨团到山东各地进行参观考察和文化交流。在数次交往接触中,张泰河的学识渊博、流利乡音和他待人和蔼可亲的态度,给我留下了很深的印象。
张泰河和夫人牟惟芝都是在韩国出生的第二代华侨。张泰河的父母早年从山东威海到韩国谋生,牟惟芝的父母出生于烟台,父亲牟少峰年轻时来到韩国,老年时在蔚山定居,是当地知名的书画家。牟惟芝从小受到家庭的艺术熏陶,书画功底深厚。
上世纪七十年代,张泰河和牟惟芝同在原州华侨小学任教员时相遇,相似的家庭背景让他们进一步相识,共同的执著与追求使他们相爱而结为连理。由于当时教师薪金微薄,他们后来经营过餐馆,辛勤的劳作和勤俭持家的美德给他们带来不少积蓄,这使得他们可以多年坚持在华侨学校教书育人。他们对汉语的教授及传播具有极大的热情,于1984年将自家经营的餐馆旧地改办成一所中文学院(培训中心)。在办学初期的3年中,以家教为主,生源不多。1987年,中韩两国建交在即,1988年,首尔奥运会又将举办,迫切希望学习中文的学生急剧增加,同时当地高中及大学也陆续开设了中文课程,张泰河应聘到延世大学(原州园区)企管系教授中文,牟惟芝也应邀到当地尚志女高及原州女高任教。同时,他们还给当地企业主管人员教授中文。
2000年和2012年,我先后两次去原州,都到过他们学院,未进学院门首先看到醒目的对联和高高挂起的红灯笼,教室内和走廊里悬挂着中式挂件和学生们的活动照片,会客厅的中堂墨宝都是牟氏父女的精品佳作,浓厚的中华传统文化气息和古色古香的摆设相得益彰,浓浓的中华传统文化气息扑面而来。韩国学生对学院里老师标准的发音十分认可,他们对中文特别感兴趣,学习成绩进步很快。学生家长们也很认同这里的教学质量和学习环境,他们良好的口碑促使一些年纪大的人也成了这里的学员。
张泰河在历任原州华侨小学校长、原州华侨协会会长、江原道华侨协会联谊会长、韩华中文学院联谊会长、韩华学术研究会会长和韩国延世大学原州园区企管系教授长达12年期间,不仅热心服务于华侨、华人的教育、维权,华侨历史研究和华侨联谊交流活动,还把很多精力倾注于中华文化的传播与中文的教育研究上。他在首尔举办的两岸三地学者“韩华学术研究会”第一届学术发表会上致主席辞,并多次到中国参加国务院侨务办公室在厦门、北京、延边等地举办的国际华文教育研讨会,还代表韩华发表有影响和指导意义的多篇论文。已过古稀之年的张泰河非常关心侨居国的经贸发展和文化建设,团结旅韩华侨、华人遵守当地政府的法律法规,积极参加驻地韩国人的文化交流活动,他经常鼓励中韩青年人互相学习,尊重对方,增进友谊,为两国人民世代友好多奉献自己的力量。
正应了中国的古话——功夫不负有心人。牟惟芝现为韩国首尔书画展特邀作家、韩国中部书画展特邀作家、江原女书画家协会会员、汉拿大学和原州文化教育院讲师。在2002年举办的中韩日国际书画交流展上,她温文尔雅的气质和娴熟的书画技艺为展会增添了光彩,并得到了大家的高度赞赏。
张泰河夫妇俩膝下育有两子一女。大儿子张景汉毕业于延世大学医科并取得医生资格,现在首尔独立经营一家整容外科医院,大儿媳出生于韩国家庭,曾在原州延世大学任教,两人已育有两个女儿。小儿子张景浩毕业于韩国世明大学中医系,并于首尔取得中医妇科及小儿科的医生资格,现在原州经营母婴中医连锁医院,小儿媳也是韩国人,两人育有两女一男。张泰河的女儿张景梅毕业于台湾大学并取得韩国首尔大学硕士学位,现与丈夫一起在延世大学(原州园区)教授中文,同时还精心经营和管理着父母创办的北京语言学院。
在张先生半个多世纪的拼搏历程中,他一直都把压抑和委屈抛在身后,当白发已经布满了他的双鬓时,在15口人的大家庭中他还是第一个起床,关心着学院的每一位老师。十几年来,他和夫人与韩国亲家们和睦相处,深受韩国人的羡慕。如今,老夫妇俩依然满面春风,踊跃参加当地多项文化活动,为积极传播中华文化不辞劳苦,为加强两国人民的友谊不惜余力,他们薪火相传的楷模形象已成为汉江上空一颗璀璨的明珠。
(本文作者为中欧文化艺术联合会山东分会副会长、山东东岳书画院副院长)